앙리 뒤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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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앙리 뒤낭은 스위스 제네바 출신으로, 국제 적십자 운동의 창시자이자 최초의 노벨 평화상 수상자이다. 그는 1859년 솔페리노 전투를 목격하고 부상병들을 위한 구호 활동에 참여한 경험을 바탕으로 《솔페리노의 추억》을 저술, 전시 부상자 구호를 위한 국제기구 창설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의 제안은 국제 적십자 위원회 창설로 이어졌으며, 1864년에는 제네바 협약이 체결되는 데 기여했다. 사업 실패와 파산으로 어려움을 겪었으나, 1895년 재조명되어 1901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그의 생일인 5월 8일은 세계 적십자 및 적신월사의 날로 기념되며, 그는 '적십자 운동의 아버지'로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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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 뒤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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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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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장 앙리 뒤낭 |
출생일 | 1828년 5월 8일 |
출생지 | 스위스 제네바 |
사망일 | 1910년 10월 30일 |
사망지 | 스위스 하이덴 |
국적 | 스위스 |
시민권 | 스위스 프랑스 (1859년부터) |
직업 | 사회 사업가, 작가 |
주요 업적 | 적십자 창립 |
수상 | 노벨 평화상 (1901년) |
로마자 표기 | |
프랑스어 | Jean-Henri Dunant |
2. 생애
스위스 제네바의 명망 있는 가문에서 태어난 앙리 뒤낭은 엄격한 칼뱅주의 전통 속에서 자라며 부모로부터 사회 복지에 대한 관심을 자연스럽게 물려받았다. 젊은 시절 학업을 중단하고 은행원으로 일하면서도 YMCA 활동에 적극 참여하여 제네바 지부를 설립하고 YMCA 세계 동맹 결성에 기여했다.
1853년, 은행 업무로 프랑스 식민지였던 알제리를 방문한 뒤 현지인들의 어려운 삶에 충격을 받았고, 이후 알제리에서 개인 사업을 시작했으나 수리권 문제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1859년, 사업 문제 해결을 위해 이탈리아 통일 전쟁에 참전 중이던 나폴레옹 3세를 만나러 갔다가 솔페리노 전투의 참상을 목격하게 된다. 수많은 부상병들이 방치된 모습에 충격을 받은 그는 즉시 자발적으로 구호 활동에 나섰고, "인류는 모두 형제"라는 신념 아래 적군과 아군을 가리지 않고 부상자를 돌보았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1862년 《솔페리노의 회상》[16]을 출간하여 전쟁 부상자 구호를 위한 중립적 국제기구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의 제안은 큰 반향을 일으켜 1863년 '국제 부상 군인 구호 상설 위원회'(5인 위원회) 결성으로 이어졌고, 이는 훗날 국제 적십자 위원회(ICRC)의 모태가 되었다. 뒤낭은 국제 회의 개최를 위해 노력했고, 그 결과 각국 대표들이 모여 제네바 협약의 기초가 되는 규약을 마련하는 등 적십자 운동의 탄생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인도주의 활동에 헌신하는 동안 알제리 사업은 결국 실패했고, 연루된 은행 파산 문제로 인해 1867년 고향 제네바를 떠나야 했다. 이후 약 20년간 유럽 각지를 떠돌며 극심한 빈곤과 외로움 속에서 잊혀진 삶을 살았다.
1887년 스위스 하이덴에 정착한 뒤낭은 1895년 한 신문 기자를 통해 우연히 세상에 다시 알려지게 되었다. 그의 업적이 재조명되면서 슈투트가르트의 루돌프 뮐러 교수 등의 추천으로 1901년, 프랑스의 프레데리크 파시와 함께 제1회 노벨 평화상을 공동 수상했다.[15]
말년에도 하이덴의 요양원에서 검소한 생활을 유지하던 뒤낭은 1910년 10월 30일, 8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사후 남은 상금은 유언에 따라 스위스와 노르웨이의 자선 단체에 기증되었다. 그의 생일인 5월 8일은 '세계 적십자의 날'로 기념되고 있으며, 그는 오늘날 "적십자의 아버지"로 불린다.
2. 1. 성장 과정
스위스 제네바에서 1828년 태어난 앙리 뒤낭은 독실한 칼뱅주의 신자이자 사회 사업에 헌신적인 부모 밑에서 성장하며 자연스럽게 봉사 정신을 배웠다. 청소년기부터 구호 활동에 참여했으며, 학업을 중단하고 은행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뒤에도 YMCA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1852년 제네바 지부를 설립하는 데 기여했다. 이후 알제리에서 개인 사업을 시도했으나 어려움을 겪었고, 사업 문제 해결을 위해 1859년 이탈리아 통일 전쟁에 참전 중이던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를 직접 만나고자 솔페리노로 향했다.2. 1. 1. 출생

장 앙리 뒤낭은 1828년 5월 8일 스위스 제네바의 명망 있는 가문에서 5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사업가이자 제네바 시의회 의원이었던 장 자크 뒤낭(Jean-Jacques Dunant)이었고, 어머니는 명문 코라돈 가문 출신의 안투아네트 뒤낭-콜라돈(Antoinette Dunant-Colladon)이었다. 뒤낭의 가족은 독실한 칼뱅주의 신자였으며 제네바 사회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졌다. 그의 부모는 사회 사업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했는데, 아버지는 고아와 가석방자들을 도왔고 어머니는 병자와 빈민을 돌보는 일에 힘썼다.
뒤낭은 'Réveil'로 알려진 종교적 각성 운동 시기에 성장했다. 1838년 제네바의 명문 학교인 칼뱅 학교에 입학했으나, 학업 성적이 좋지 않아 3년 만에 중퇴하고 가정교사를 통해 교양을 쌓았다. 뒤낭은 18세에 제네바 구호 협회에 가입했으며, 이듬해 친구들과 함께 성경 공부와 빈민 구제를 위한 "목요일 협회"를 만들었다. 그는 여가 시간의 상당 부분을 교도소 방문과 사회 사업에 쏟았다.
1849년, 21세의 뒤낭은 성적 부진으로 제네바 칼뱅 대학교를 중퇴하고, 환전 회사인 ''Lullin et Sautter''에서 수습 생활을 시작했다. 수습 과정을 성공적으로 마친 뒤 은행원으로 근무했다. 은행원으로 일하면서도 기독교 활동에 힘썼으며, 조지 윌리엄스가 런던에서 설립한 기독교 청년회(YMCA)를 모델로 국제적인 청년 연합 조직을 구상했다. 1852년 11월 30일, 그는 YMCA 제네바 지부를 설립했고, 3년 뒤인 1855년에는 파리에서 열린 YMCA 국제 회의에 참석하여 "YMCA 세계 동맹" 결성에 기여했다.
2. 1. 2. 유년기
앙리 뒤낭은 1828년 5월 8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사업가 장 자크 뒤낭(Jean-Jacques Dunant)과 안투아네트 뒤낭-콜라돈(Antoinette Dunant-Colladon) 사이의 다섯 형제 중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독실한 칼뱅주의 신자였으며, 제네바 사회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아버지 장 자크 뒤낭은 공화당 의원이자 복지 고아원 원장을 지냈고, 어머니 안투아네트는 명문가 출신으로 병자와 빈민을 돌보는 등 복지 활동에 열성적이었다.
뒤낭은 부모의 영향으로 개신교 신앙 안에서 사회 사업의 중요성을 배우며 자랐다. 그는 ''Réveil''로 알려진 종교적 각성 운동 시기에 성장했으며, 청소년기부터 부모를 따라 환자와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에 참여했다. 1838년 제네바의 명문 학교인 칼뱅 학교에 입학했으나, 학업 성적이 좋지 않아 3년 만에 중퇴하고 가정교사에게 교양 수업을 받았다.
18세가 되던 해(1846년경), 뒤낭은 제네바 구호 협회에 가입했다. 이듬해에는 친구들과 함께 성경을 공부하고 가난한 이들을 돕기 위한 모임인 "목요일 협회"를 만들었으며, 여가 시간에는 교도소를 방문하는 등 사회 사업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1849년, 21세의 뒤낭은 성적 문제로 제네바 칼뱅 대학교를 중퇴하고, 환전 회사인 ''Lullin et Sautter''(폴 루랑 에 소테 은행)에서 2년간의 수습 생활을 시작했다. 수습 과정을 성공적으로 마친 뒤에는 은행 직원으로 일했다. 은행원으로 일하면서도 기독교 활동에 힘썼으며, 서유럽 여러 나라의 젊은 복음주의 운동가들과 교류했다.
이 시기 영국 런던에서 조지 윌리엄스에 의해 YMCA(기독교 청년회)가 설립된 것에 영향을 받아, 뒤낭은 각국의 기독교 단체를 연결하는 국제적인 조직의 필요성을 느꼈다. 1852년 11월 30일, 그는 YMCA 제네바 지부를 설립했으며, 3년 후인 1855년에는 YMCA 세계 동맹 결성을 위한 파리 회의에 참석하여 국제 기구 설립에 기여했다.
2. 1. 3. 청년기
개신교 전통에서 자란 앙리 뒤낭은 나눔을 중시하는 개혁교회 신앙을 받아들였다. 부모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부터 병자와 가난한 이들을 돕는 일에 참여했으며, 1844년에는 영국 복음주의자들이 만든 YMCA 창설에 참가했다. 18세에는 제네바 구호 협회에 가입했고, 이듬해 친구들과 함께 성경 공부와 빈민 구제를 위한 "목요일 협회"를 설립했다. 그는 여가 시간의 상당 부분을 교도소 방문과 사회 사업에 할애했으며, 1852년 11월 30일에는 YMCA 제네바 지부를 설립하고 3년 후 파리에서 열린 국제 기구 설립 회의에도 참석했다.1849년, 21세의 뒤낭은 좋지 않은 성적 때문에 제네바 칼뱅 대학교를 중퇴하고, 환전 회사인 ''Lullin et Sautter''(폴 루랑 에 소테 은행)에서 수습 생활을 시작했다. 수습 과정을 성공적으로 마친 뒤에는 은행 직원으로 계속 근무했다.
1853년, 뒤낭은 은행 업무로 프랑스 식민지였던 알제리, 튀니지, 시칠리아를 방문했다. 경험 부족에도 불구하고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했으며, 이 경험을 바탕으로 1858년 첫 저서인 Notice sur la Régence de Tunis|튀니스 왕국에 대한 고찰프랑스어을 출판했다. 알제리 방문 당시 현지 주민들이 겪는 차별과 빈곤에 충격을 받기도 했다.
1854년 은행을 퇴직한 뒤낭은 1856년 해외 식민지 사업을 위한 회사를 설립했다. 프랑스 점령 하의 알제리에서 토지 사용 허가를 받아 1858년, 옥수수 재배 및 무역 회사인 Société financière et industrielle des Moulins des Mons-Djémila|몽-제밀라 제분소 금융 및 산업 회사프랑스어를 세워 현지 주민들의 생활 개선을 위한 사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토지 및 수자원 권리가 명확히 보장되지 않았고 식민 당국의 비협조로 사업은 난관에 부딪혔다. 결국 뒤낭은 1859년, 사업 문제 해결을 위해 당시 롬바르디아에서 제2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에 참전 중이던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에게 직접 청원하기로 결심하고 그가 머무르던 솔페리노로 향했다.
2. 2. 적십자 창립
1859년 이탈리아 통일전쟁 중 사업 문제로 나폴레옹 3세를 만나러 북이탈리아로 가던 뒤낭은 솔페리노 전투 직후의 참상을 목격하게 되었다. 수많은 부상병들이 국적에 상관없이 고통받는 모습에 충격을 받고, 그는 자발적으로 구호 활동에 참여했다. 이때 현지 여성들과 함께 Tutti fratelli|투티 프라텔리it (모두는 형제다)라는 구호 아래 부상병들을 돌본 경험은 그의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제네바로 돌아온 뒤낭은 1862년, 자신의 경험과 구상을 담은 책 《솔페리노의 회상》(Un Souvenir de Solferino프랑스어)[16]을 출간했다. 이 책에서 그는 전투의 참혹함을 생생히 전하며, 전쟁 시 부상자를 돌볼 중립적인 민간 국제기구의 창설과 이를 위한 국제적 협약의 필요성을 강력히 주장했다. 이 책은 유럽 전역에 큰 반향을 일으켰고, 뒤낭의 제안은 국제적인 논의로 이어졌다.
뒤낭의 제안은 제네바의 공공복지협회에서 받아들여졌고, 1863년 2월 17일, 뒤낭을 포함한 5명의 위원(구스타브 무니에, 앙리 뒤푸르, 루이 아피아, 테오도르 모누아)으로 구성된 '국제 부상 군인 구호 상설 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이 날은 오늘날 국제 적십자 위원회(ICRC)의 창립일로 여겨진다. 이 위원회의 노력으로 1863년 10월에는 제네바에서 16개국 대표가 참석한 국제 회의가 열렸고, 이듬해인 1864년 8월 22일에는 12개국이 서명한 제1차 제네바 협약이 체결되었다. 이 협약은 전쟁 부상자의 중립적 보호와 구호 활동의 법적 기반을 마련하며 국제 인도주의 활동의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다.
2. 2. 1. 솔페리노 전투
1859년, 뒤낭은 알제리에서 운영하던 "몽-제밀라 제분소 금융 및 산업 회사"의 사업 문제, 특히 토지와 수자원 권리 확보의 어려움을 해결하고자 직접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에게 청원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나폴레옹 3세는 이탈리아 통일전쟁(제2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에 프랑스군을 이끌고 피에몬테-사르디니아를 지원하며 오스트리아 제국과 싸우고 있었고, 롬바르디아의 작은 마을 솔페리노 인근에 주둔하고 있었다. 뒤낭은 나폴레옹 3세에게 헌정할 목적으로 그를 칭송하는 내용의 책을 준비하여 솔페리노로 향했다.[16]
뒤낭이 솔페리노에 도착한 1859년 6월 24일 저녁, 바로 그날 인근에서는 솔페리노 전투가 벌어졌다. 전투 현장에는 약 4만 명에 달하는 부상자와 죽어가는 병사들이 거의 아무런 의료 지원도 받지 못한 채 방치되어 있었다. 이 참혹한 광경에 큰 충격을 받은 뒤낭은 즉시 구호 활동에 나섰다. 그는 지역의 민간인들, 특히 여성과 소녀들을 조직하여 부상당한 병사들을 돌보기 시작했다. 물자와 보급품이 부족했기 때문에, 뒤낭은 직접 필요한 물품을 구입하고 임시 병원을 세우는 일을 도왔다. 그는 인근 도시 카스티글리오네 델레 스티비에레의 여성들이 내건 슬로건인 "Tutti fratelli|투티 프라텔리it" (모두 형제입니다) 정신에 따라, 국적이나 소속 군대에 상관없이 모든 부상자를 동등하게 돌봐야 한다고 주민들을 설득했다. 또한, 그는 프랑스군과 영국군에 포로로 잡혀 있던 오스트리아 제국 의사들을 설득하여 석방시키는 데 성공했다.
솔페리노에서의 이 경험은 뒤낭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으며, 훗날 그가 전쟁 부상자 구호의 필요성을 역설한 책 《솔페리노의 회상》(1862)을 집필하고 국제 적십자 위원회 창설을 주도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2. 2. 2. 구호 활동
1859년 이탈리아 통일전쟁 중 제분회사의 수리권(水利權) 문제로 나폴레옹 3세를 만나러 가던 뒤낭은 솔페리노 전투 직후인 6월 24일 저녁 솔페리노에 도착했다. 전투 현장에는 약 4만 명의 부상자와 죽어가는 병사들이 적절한 의료 지원 없이 방치되어 있었다.이 참혹한 광경에 큰 충격을 받은 뒤낭은 즉시 자발적으로 구호 활동에 나섰다. 그는 현지 여성들을 중심으로 한 민간인들을 조직하여 부상당한 병사들을 돕도록 이끌었다. 당시에는 충분한 물자와 보급품이 부족했기 때문에, 뒤낭은 직접 필요한 물품을 사비로 구입하고 임시 병원을 세우는 데 힘을 보탰다.
뒤낭은 인근 도시 카스티글리오네 델레 스티비에레 주민들을 설득하며 Tutti fratelli|투티 프라텔리it (모두는 형제다)라는 정신을 강조했다. 이는 국적이나 소속 군대에 상관없이 모든 부상자를 동등하게 도와야 한다는 인도주의적 원칙이었다. 그는 이 원칙에 따라 약 1주일간 솔페리노에 머물며 헌신적으로 구호 활동을 펼쳤다. 또한, 프랑스군에게 포로로 잡혀 있던 오스트리아 의사들의 석방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내기도 했다.
이때의 경험은 훗날 뒤낭이 저술한 《솔페리노의 회상》(1862년)의 바탕이 되었다.[16] 이 책을 통해 그는 전쟁 중 부상자를 돌볼 중립적인 민간 국제기구의 필요성을 강력히 주장했으며, 이는 국제 적십자 위원회 창설의 계기가 되었다.
2. 2. 3. 《솔페리노의 추억》
1859년, 뒤낭은 알제리에서의 사업 문제(수리권 획득)를 해결하기 위해 이탈리아 통일전쟁에 참전 중이던 나폴레옹 3세를 만나러 가던 중, 6월 24일 저녁 솔페리노에 도착했다. 바로 그날 근처에서 벌어진 솔페리노 전투로 인해 약 4만 명의 부상자와 사망자가 의료 지원을 거의 받지 못한 채 방치되어 있었다. 참혹한 광경에 충격을 받은 뒤낭은 즉시 민간인들, 특히 여성들을 조직하여 부상병들을 돌보기 시작했다. 부족한 물자를 직접 사비로 충당하고 임시 병원을 세우는 데 힘썼으며, 카스티글리오네 델레 스티비에레 마을 여성들이 외친 Tutti fratelli|투티 프라텔리it (모두가 형제다)라는 구호 아래 적군과 아군을 가리지 않고 부상자를 치료하도록 주민들을 설득했다. 또한 프랑스군에게 포로로 잡힌 오스트리아 의사들의 석방을 성공시키기도 했다.7월 초 제네바로 돌아온 뒤낭은 솔페리노에서의 참혹한 경험을 기록으로 남기기로 결심하고, 1862년 자신의 비용으로 《솔페리노의 추억》(Un Souvenir de Solferino|엉 수브니흐 드 솔페리노프랑스어)[16]이라는 책 1,600부를 출간했다. 이 책에서 그는 전투의 참상과 부상자들이 겪는 고통, 그리고 구호 활동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생생하게 묘사하며, 전쟁 시 부상병 간호를 위한 중립적인 민간 국제기구의 필요성을 강력히 주장했다. 그는 유럽의 주요 정치 및 군사 지도자들에게 이 책을 보내 자신의 구상을 알렸다.

뒤낭의 책은 유럽 전역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는 직접 유럽 각지를 순회하며 자신의 아이디어를 알리는 데 힘썼다. 1863년 2월 9일, 제네바 공공복지협회 회장이었던 법률가 구스타브 무니에는 협회 회의에서 뒤낭의 책과 제안을 주요 안건으로 다루었다. 회원들은 뒤낭의 제안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이를 구체화하기 위해 뒤낭을 포함한 5인 위원회(뒤낭, 무니에, 앙리 뒤푸르 장군, 의사 루이 아피아, 테오도르 모누아)를 구성했다. 이 위원회가 처음 모인 1863년 2월 17일은 오늘날 국제 적십자 위원회(ICRC)의 창립일로 여겨진다.
하지만 위원회 활동 초기부터 이상주의적인 뒤낭과 실용적인 접근을 중시한 무니에 사이에는 의견 충돌이 있었다. 무니에는 의료 인력 보호를 위한 중립성 확보라는 뒤낭의 아이디어가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하고 만류했지만, 뒤낭은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고 고위 정치 및 군사 인사들을 설득하는 노력을 계속했다. 이러한 노력은 1863년 10월 제네바에서 14개국 대표가 참여하여 부상병 치료 개선 방안을 논의한 국제 회의와, 이듬해인 1864년 8월 22일 스위스 연방평의회 주최 하에 12개국이 서명한 제1차 제네바 협약 체결로 이어지며 국제 적십자 운동의 초석을 다졌다. 뒤낭은 이 회의들에서 의사록 작성과 참석자 숙소 마련 등의 실무를 담당하며 기여했다.
2. 2. 4. 국제 적십자 위원회 창설
1859년 이탈리아 통일전쟁 당시, 뒤낭은 사업 문제로 나폴레옹 3세를 만나러 가던 중 솔페리노 전투의 참상을 목격하게 된다. 그는 국적을 가리지 않고 부상병 구호 활동에 참여했으며, 이때의 경험은 그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쳤다.[16]1862년, 뒤낭은 자신의 경험을 담은 책 《솔페리노의 회상》(Un Souvenir de Solferino프랑스어)을 자비로 출판했다.[16] 이 책에서 그는 전투의 참혹함과 부상병들이 처한 비참한 상황을 생생하게 묘사하며, 전쟁 시 부상자를 돌볼 중립적인 민간 국제기구의 필요성을 강력히 주장했다. 이 책은 유럽의 주요 정치 및 군사 지도자들에게 전달되어 큰 반향을 일으켰다.
뒤낭의 제안은 제네바 공공복지협회에서 논의되었고, 협회 회장이자 법률가인 구스타브 무니에는 1863년 2월 9일 회의에서 이를 주요 안건으로 다루었다. 뒤낭의 제안은 긍정적으로 평가받았으며, 실행 가능성을 검토하기 위해 5명으로 구성된 위원회가 조직되었다. 뒤낭 자신을 포함하여 구스타브 무니에, 스위스 육군 장군 앙리 뒤푸르, 의사 루이 아피아와 테오도르 모누아가 위원으로 참여했다. 위원회가 처음 모인 1863년 2월 17일은 오늘날 국제 적십자 위원회(ICRC)의 창립일로 여겨진다.
초기부터 뒤낭과 무니에는 기구의 방향과 계획을 두고 의견 차이를 보였다. 특히 무니에는 의료 인력의 중립적 보호라는 뒤낭의 이상적인 주장이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했지만, 뒤낭은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고 고위 인사들을 설득하는 노력을 계속했다. 이는 실용적인 접근을 중시한 무니에와 이상주의자였던 뒤낭 사이의 갈등을 심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1863년 10월, 위원회는 제네바에서 국제 회의를 개최하여 16개국 대표들과 함께 부상병 치료 개선 방안을 논의했다. 이 회의에서 뒤낭은 의사록 작성을 담당했으며, 적십자 규약 10개조가 채택되었다. 이는 각국에 전시 구호 단체를 조직하고 국제적인 적십자 운동을 발전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듬해인 1864년 8월 22일, 스위스 연방평의회가 주최한 외교 회의에서 12개국 대표가 모여 제1차 제네바 협약에 서명했다. 이 협약은 전시 부상병의 중립적 보호와 구호 활동의 법적 기반을 마련한 역사적인 문서이다. 뒤낭은 이 회의의 성공적인 개최를 위해 참석자들의 숙소 마련 등 실무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2. 2. 5. 제네바 협약
1859년 이탈리아 통일전쟁 당시, 뒤낭은 사업 문제로 나폴레옹 3세를 만나러 가던 중 북부 이탈리아에서 솔페리노 전투의 참상을 목격했다. 그는 수많은 부상병들이 국적과 상관없이 고통받는 모습을 보고 자발적으로 구호 활동에 참여했다. 이때의 경험은 그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쳤다.제네바로 돌아온 뒤낭은 자신의 경험을 기록하기로 결심하고, 1862년 『솔페리노의 회상』(Un Souvenir de Solferino|솔페리노의 회상fra)[16]이라는 책을 자비로 출판했다. 이 책에서 그는 전투의 참혹함과 부상병들의 고통을 생생하게 묘사하며, 전쟁 시 부상병 구호를 위한 중립적인 민간 국제기구의 필요성을 강력히 주장했다. 또한, 그는 이 책을 유럽의 주요 정치 및 군사 지도자들에게 보내 자신의 구상을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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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낭의 제안은 유럽 각국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제네바 공공복지협회는 그의 제안을 논의했고, 1863년 2월 9일 회의에서 이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실행 가능성을 검토하기 위해 뒤낭을 포함한 5명의 위원(구스타브 무니에, 앙리 뒤푸르, 루이 아피아, 테오도르 모누아)으로 구성된 위원회가 발족되었으며, 이들의 첫 회의가 열린 1863년 2월 17일은 오늘날 국제 적십자 위원회(ICRC)의 창립일로 여겨진다. 하지만 초기부터 실용적인 접근을 중시한 무니에와 이상주의적인 뒤낭 사이에는 의료진의 중립성 보장 문제 등을 놓고 의견 차이가 있었다.
뒤낭의 노력과 위원회의 활동은 국제적인 회의로 이어졌다. 1863년 10월, 14개국 대표가 제네바에 모여 부상병 치료 개선 방안을 논의했다. 이듬해인 1864년 8월 22일, 스위스 연방평의회 주최로 열린 외교 회의에서 12개국이 역사적인 제1차 제네바 협약에 서명했다. 이 협약은 전쟁 중 부상당한 군인과 이들을 돌보는 의료진 및 시설의 중립성을 보장하고 보호하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 국제 인도법의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뒤낭은 이 회의에서 참석자들의 숙소를 마련하는 등 실무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이로써 뒤낭의 솔페리노에서의 경험과 『솔페리노의 회상』을 통해 제시된 구상이 제네바 협약이라는 국제적인 결실을 맺게 되었다.
2. 3. 잊혀진 시기

적십자 활동을 통해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을 포함한 전 재산을 사용한 앙리 뒤낭은, 알제리에서의 사업 실패와 금융 회사 '크레디트 제네보아'(''Crédit Genevois'')의 파산 스캔들로 인해 결국 파산을 선언하고 1867년 고향 제네바를 떠나야 했다.[1][2] 이후 그는 프랑스 파리 등지로 이주하여 글을 옮겨 적는 일을 하는 등 궁핍한 생활을 이어갔다.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 발발하자 잠시 구호 활동에 참여하기도 했으나,[1] 점차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 갔다.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스웨덴, 프로이센, 스페인 등 여러 나라 적십자사의 명예 회원으로 임명되기도 했지만,[1] 정작 적십자 운동이 세계적으로 확산되는 과정에서는 공식적인 논의에서 거의 언급되지 않으며 소외되었다.[1] 그는 1874년부터 1886년까지 약 10여 년간 슈투트가르트, 로마, 코르푸, 바젤, 칼스루에 등 유럽 여러 도시를 떠돌며 극심한 빈곤과 외로움 속에서 불안정한 생활을 했다.[1]
1887년, 런던에 머물던 중 먼 친척들로부터 매달 생활비를 지원받기 시작하면서 경제적으로 다소 안정을 찾게 되었고, 그해 7월 스위스의 작은 휴양 마을 하이덴으로 이주했다.[1] 1892년 4월 30일 이후부터는 건강이 악화되어, 의사 헤르만 알테르(Hermann Altherr) 박사의 배려로 알프스가 보이는 지역 병원이자 양로원에서 지내게 되었다.[1][2] 이곳에서 여생의 마지막을 보내게 되는데, 이 시기까지도 그는 여전히 세상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채 조용히 살아가고 있었다.
2. 3. 1. 사업 실패와 파산
뒤낭의 알제리 사업은 실패로 끝났다. 1867년 4월, 금융 회사 ''크레디트 제네보아''(Crédit Genevois)가 파산하면서 뒤낭을 둘러싼 스캔들이 불거졌고, 그는 결국 파산을 선언했다.[1][2] 칼뱅주의 전통이 강한 제네바 사회의 비난 여론 속에서, 국제 위원회 내부에서도 그의 사퇴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결국 뒤낭은 1867년 8월 25일 사무총장직에서 물러났고, 같은 해 9월 8일에는 위원회에서 완전히 제명되었다.[1][2] 1868년 8월 17일, 제네바 상업법원은 파산 과정에서의 기만적인 행위를 이유로 그에게 유죄 판결을 내렸다.[1] 이 파산으로 회사에 투자했던 그의 가족과 많은 친구들 역시 큰 경제적 타격을 입었다.[1]1868년 2월에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고,[1] 같은 해 후반에는 YMCA에서도 추방당했다. 제네바 YMCA의 창립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업 실패가 단체에 해를 끼쳤다는 이유에서였다.[1] 뒤낭은 이미 1867년 3월에 고향 제네바를 떠났으며, 이후 평생 돌아가지 않았다.[1]
이후 몇 년간, 무니에는 자신의 영향력을 이용해 뒤낭이 친구들로부터 도움과 지원을 받는 것을 방해하려 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1] 예를 들어, 1867년 파리 만국 박람회의 '도덕 과학'(Sciences Morales) 부문 금메달은 당초 뒤낭에게 수여될 예정이었으나, 결국 상금이 위원회 전체에 돌아가도록 무니에, 뒤푸르, 뒤낭 세 사람에게 공동으로 수여되었다.[1] 또한 나폴레옹 3세가 뒤낭의 친구들이 나머지 절반을 부담한다면 그의 빚 절반을 탕감해주겠다고 제안했지만, 이 역시 무니에의 노력으로 무산되었다.[1]
결국 뒤낭은 파리로 이주하여 궁핍한 생활을 이어가야 했다.[1][2]
2. 3. 2. 고독과 빈곤
적십자 활동을 통해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을 포함한 전 재산을 사용한 앙리 뒤낭은 1867년 그의 알제리 사업 실패와 금융 회사 '크레디트 제네보아'(''Crédit Genevois'')의 파산 스캔들에 연루되어 파산을 선언했다. 칼뱅주의 전통이 강한 고향 제네바에서의 사회적 비난은 거셌고, 결국 국제 위원회에서도 스스로 물러나라는 압박을 받았다. 그는 1867년 8월 25일 사무총장직에서 사임했고, 같은 해 9월 8일에는 위원회에서 완전히 제명되었다. 이듬해인 1868년 8월 17일, 뒤낭은 제네바 상업법원으로부터 파산 과정에서의 기만적인 행위로 유죄 판결을 받았으며, 이로 인해 그의 가족과 친구들 역시 큰 경제적 피해를 입었다.
개인적인 불행도 겹쳤다. 1868년 2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고, 같은 해 사업 실패가 단체에 해를 끼쳤다는 이유로 자신이 창립 멤버였던 제네바 YMCA에서도 추방당했다. 결국 뒤낭은 1867년 3월, 평생 돌아오지 않을 고향 제네바를 떠나야 했다. 이후 몇 년간, 국제 위원회의 무니에는 자신의 영향력을 이용해 뒤낭이 주변으로부터 도움을 받지 못하도록 방해한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1867년 파리 만국 박람회의 '도덕 과학' 부문 금메달은 당초 뒤낭에게 수여될 예정이었으나, 무니에, 뒤푸르, 뒤낭 세 사람에게 공동으로 수여되어 상금이 위원회 전체에 돌아가도록 변경되었다. 또한 나폴레옹 3세가 뒤낭의 빚 절반을 탕감해주겠다는 제안 역시 무니에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프랑스 파리로 이주한 뒤낭은 궁핍한 생활을 이어갔지만, 인도주의적 이상과 계획을 포기하지 않았다. 1870년 발발한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중에는 공동 구호 협회(''Allgemeine Fürsorgegesellschaft'')를 설립했고, 전쟁 후에는 질서와 문명을 위한 공동 동맹(''Allgemeine Allianz für Ordnung und Zivilisation'')을 만들었다. 그는 군비 축소 협상과 분쟁 중재를 위한 국제 사법 재판소 설립을 주장했으며, 훗날 유네스코와 같은 기구의 모태가 된 세계 도서관 설립을 위해 노력하기도 했다.
그러나 자신의 이상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개인적인 삶과 수입을 돌보지 못해 빚은 더욱 늘어났고, 지인들에게 외면당했다.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스웨덴, 프로이센, 스페인 등 여러 나라 적십자사의 명예 회원으로 임명되기도 했지만, 적십자 운동이 세계적으로 확산되는 와중에도 그는 점차 잊혀 갔다. 그는 빈곤 속에서 1874년부터 1886년까지 슈투트가르트, 로마, 코르푸, 바젤, 칼스루에 등 유럽 여러 도시를 떠돌아다녔다. 슈투트가르트에서는 튀빙겐 대학교 학생 루돌프 뮐러를 만나 깊은 우정을 나누었다.
1881년, 뒤낭은 슈투트가르트 친구들과 함께 스위스의 작은 휴양 마을 하이덴을 처음 방문했다. 1887년 런던에 머물던 중, 먼 친척들로부터 매달 생활비를 지원받기 시작하면서 경제적으로 다소 안정을 찾게 되었고, 그해 7월 하이덴으로 이주하여 여생을 보냈다. 1892년 4월 30일부터는 의사 헤르만 알테르(Hermann Altherr) 박사의 배려로 알프스가 보이는 병원이자 양로원에서 지냈다.
하이덴에서 그는 젊은 교사 빌헬름 손데레거(Wilhelm Sonderegger)와 그의 아내 수잔나를 만나 교류하며 자신의 삶을 기록하라는 격려를 받았다. 수잔나 손데레거는 하이덴에 적십자 지부를 설립했고, 뒤낭은 1890년 명예 회장이 되었다. 뒤낭은 손데레거와 함께 자신의 저서 개정판 출판 등을 통해 다시 한번 자신의 사상을 알리려 했으나, 후에 손데레거가 제네바의 무니에와 결탁하여 자신을 음해한다고 오해하면서 둘의 우정은 틀어졌다. 손데레거는 1904년 4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관계가 소원했음에도 뒤낭은 그의 예기치 못한 죽음에 깊이 슬퍼했다. 손데레거 부부의 뒤낭에 대한 존경심은 자녀들에게 이어져, 1935년 아들 르네는 뒤낭이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들을 모아 출판했다.
1901년 뒤낭은 박애 정신과 평화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제1회 노벨 평화상을 프레데리크 파시와 공동 수상했지만, 그의 생활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다. 1910년 10월 30일, 그는 스위스 아펜첼아우서로덴주 하이덴에서 사람들에게 잊힌 채 82세의 나이로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2. 4. 재조명과 노벨 평화상
적십자 활동 등으로 재산을 모두 소진한 뒤낭은 말년에 스위스 하이덴의 요양소 겸 병원에서 지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1895년, 한 신문 기사를 통해 그의 업적이 재조명되면서 다시 세상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이를 계기로 여러 지원과 기부금이 이어지면서 그의 형편도 다소 나아졌다.마침내 1901년, 적십자 운동 창설과 제네바 협약 제정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제1회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15] 하지만 노벨상 수상 이후에도 그의 생활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고, 1910년 10월 30일 하이덴에서 8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사후에 남은 상금은 유언에 따라 스위스와 노르웨이의 자선 단체 등에 기증되었다.
2. 4. 1. 재조명
1895년 9월, 스위스 상트갈렌 지역 신문 ''Die Ostschweiz''의 편집장 게오르크 바움베르거(Georg Baumberger)는 한 달 전 하이덴에서 산책 중 만나 이야기를 나눈 적십자 창립자 앙리 뒤낭에 관한 기사를 작성했다. "앙리 뒤낭, 적십자의 창립자"라는 제목의 이 기사는 독일 삽화 잡지 ''Über Land und Meer''에 실렸고, 곧 유럽 전역의 다른 출판물에도 재인쇄되었다.이 기사는 큰 반향을 일으켰고, 오랫동안 세상에서 잊혔던 뒤낭은 다시금 대중의 주목과 지지를 받게 되었다. 그는 스위스 비네-펜트(Binet-Fendt) 상을 받았고, 교황 레오 13세로부터 편지를 받기도 했다. 러시아 황후 마리아 표도로브나의 지원과 다른 기부금 덕분에 그의 재정 상황은 눈에 띄게 개선되었다.
1897년, 슈투트가르트에서 교사로 일하고 있던 루돌프 뮐러(Rudolf Müller)는 적십자의 기원에 관한 책을 썼는데, 이 책은 기존의 공식 역사를 수정하여 뒤낭의 역할을 강조했다. 이 책에는 뒤낭이 쓴 『솔페리노의 회상』의 본문도 포함되어 있었다. 뒤낭은 오스트리아의 평화주의 운동가 베르타 폰 주트너와 서신 교환을 시작했고, 수많은 기사와 글을 썼다. 그는 특히 여성의 권리에 대해 적극적으로 글을 썼고, 1897년에는 브뤼셀에서 짧은 기간 동안 활동했던 "녹색 십자(Green Cross)" 여성 단체의 설립을 도왔다.
루돌프 뮐러 교수는 노벨 평화상 심사 위원회에 뒤낭을 추천했고, 그 결과 1901년 뒤낭은 제1회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15]
2. 4. 2. 노벨 평화상 수상
1895년 9월, 상트갈렌(St. Gallen) 지역 신문 ''Die Ostschweiz''의 편집장 게오르크 바움베르거(Georg Baumberger)는 한 달 전 하이덴에서 우연히 만난 뒤낭에 관한 기사를 썼다. "앙리 뒤낭, 적십자의 창립자"라는 제목의 이 기사는 독일 잡지 ''Über Land und Meer''에 실린 뒤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가며 큰 반향을 일으켰고, 뒤낭은 다시 세상의 주목과 지지를 받게 되었다. 이 덕분에 그의 재정 상황도 다소 개선되었다.1897년에는 슈투트가르트의 교사 루돌프 뮐러(Rudolf Müller)가 적십자 창립에 관한 책을 출판하며 공식 기록을 바로잡고 뒤낭의 핵심적인 역할을 강조했다. 이 책에는 뒤낭이 쓴 ''솔페리노의 회상''의 내용도 포함되었다.

1901년, 뒤낭은 국제 적십자 운동의 창설과 제네바 협약을 이끌어낸 공로를 인정받아 제1회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이 상은 프랑스의 평화주의자 프레데리크 파시(Frédéric Passy)와 공동으로 수여되었다. 뒤낭의 수상을 위해 뮐러와 노르웨이 군의관 한스 다에(Hans Daae)가 4년간 노벨 위원회에 그의 공적을 알리며 지지를 호소했다.[4][5]
국제 적십자 위원회로부터 받은 공식 축하 메시지는 뒤낭의 명예가 완전히 회복되었음을 의미했다.
"이 영예를 더욱 받을 만한 사람은 없습니다. 40년 전, 당신은 전장에서 부상당한 사람들을 구호하기 위한 국제 기구를 설립했습니다. 당신이 없었다면 19세기 최고의 인도주의적 성과인 적십자는 아마도 시작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수상자 선정 과정에서 뒤낭은 폭넓은 지지를 받았으나, 무아니에(Moynier)와 국제 위원회 전체도 후보로 거론되는 등 논란이 있었다. 일각에서는 적십자와 제네바 협약이 오히려 전쟁의 참혹함을 일부 덜어주어 전쟁을 더 쉽게 만들 수 있다는 비판도 제기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뮐러는 뒤낭의 고령과 건강을 고려하여 조속히 시상해야 하며, 상을 뒤낭과 파시에게 나누어 수여할 것을 노벨 위원회에 제안했다.
노벨 위원회는 평화주의자인 파시와 인도주의자인 뒤낭에게 상을 공동 수여함으로써 노벨 평화상 선정 기준에 대한 중요한 선례를 남겼다. 알프레드 노벨의 유언에는 상비군 감축이나 폐지, 평화 회의 증진에 기여한 인물에게 상을 주도록 명시되어 있어 파시가 유력한 후보였다. 반면, 뒤낭의 인도주의적 공로에 대한 수상은 유언의 의미를 넓게 해석한 것이라는 시각도 있었다. 그러나 유언의 다른 부분에는 "인류의 형제애" 증진에 기여한 인물에게 상을 수여한다는 내용도 있어, 뒤낭의 활동 역시 평화 증진과 연결될 수 있다는 해석이 가능했다. 이 결정은 이후 노벨 평화상 수상자 선정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한스 다에는 뒤낭의 상금 10.4만스위스 프랑을 노르웨이 은행에 예치하여 채권자들이 함부로 손댈 수 없도록 보호했다. 뒤낭 자신은 생전에 이 돈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으며, 소박한 생활을 유지하다 세상을 떠난 후 유언에 따라 자신을 돌봐준 이들과 자선 단체에 기부했다.[4]
2. 5. 말년과 죽음
적십자 활동과 알제리 사업 실패로 인해 모든 재산을 잃고 파산한 앙리 뒤낭은 1867년 고향 제네바를 떠나야 했다. 이후 프랑스 파리 등지에서 글을 옮겨 적는 일을 하였고,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당시에는 잠시 구호 활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곧 적십자 운동에서 배제되고 세상에서 잊혀 갔다. 약 20년간 그는 유럽 각지를 떠돌며 빈곤 속에서 불안정한 삶을 살았다.1887년 건강이 나빠져 스위스 하이덴에 머물게 되었고, 1892년부터는 의사 헤르만 알터(Hermann Altherr)의 도움으로 지역 병원에서 지내게 되었다.[15] 이곳에서 조용히 지내던 중 1895년 우연한 계기로 그의 생존과 공적이 다시 알려지면서[15] 국제적인 관심이 되살아났고, 1901년에는 제1회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15] 그러나 노벨상 수상 이후에도 그의 생활은 크게 변하지 않았으며, 여전히 검소한 삶을 유지했다.
1910년 10월 30일, 뒤낭은 하이덴의 병원에서 82세의 나이로 조용히 눈을 감았다.
2. 5. 1. 하이덴 요양원
1887년, 건강이 나빠진 뒤낭은 스위스 북동부의 하이덴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3년 이상 하숙하며 하이덴 적십자 창설에 깊이 관여했다. 잠시 다른 마을로 이주하기도 했지만, 다시 하이덴으로 돌아와 1892년부터는 병원장 알터 박사의 도움으로 하이덴 공립 병원의 한 방에서 지내게 되었다. 그는 사망할 때까지 이곳에 머물렀다.말년에는 병원에서 집필 활동에 몰두하며 자서전 등을 남겼다. 1895년, 스위스 동부 신문 《오스트 슈바이츠》의 편집자가 뒤낭을 찾아와 인터뷰했고, 이 기사가 독일 슈투트가르트의 주간지에 크게 실리면서 오랫동안 잊혔던 그의 공적이 다시 세상에 알려졌다. 이를 계기로 루돌프 뮐러 교수가 그를 노벨 평화상 위원회에 추천했고, 1901년 제1회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게 되었다.[15]
뒤낭은 1910년 10월 30일, 하이덴에서 82세의 나이로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그는 사망할 때까지 검소한 생활을 유지했으며, 거의 사용하지 않은 노벨상 상금은 유언에 따라 스위스와 노르웨이의 적십자사에 기증되었다. 현재 하이덴에는 그의 업적을 기리는 앙리 뒤낭 박물관이 있다.
2. 5. 2. 죽음과 유산
1892년 4월 30일 이후 뒤낭은 의사 헤르만 알터의 배려로 스위스 하이덴에 있는 병원에서 여생을 보냈다.[15] 이곳에서 그는 집필 활동을 하며 자서전 등을 기록했다. 1895년 한 신문 기사를 통해 그의 공적이 다시 알려지면서[15], 1901년에는 제1회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15] 그러나 수상 이후에도 그의 생활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으며, 검소한 생활을 고수했다.1910년 10월 30일, 뒤낭은 하이덴의 병원에서 8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유언에 따라 노벨상 상금을 포함한 남은 재산을 스위스와 노르웨이의 적십자사에 기증했다.
뒤낭의 인도주의 정신은 여러 방식으로 기억되고 있다. 적십자의 상징인 붉은 십자 표식은 그의 모국 스위스 국기의 색 배치를 반대로 한 것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17] 하이덴에는 앙리 뒤낭 박물관이 있다. 또한 그의 생일인 5월 8일은 '세계 적십자의 날'로 지정되어 기념되고 있다. 뒤낭은 적십자 운동을 창시한 공로로 "적십자의 아버지"로 불린다. 뒤낭은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의 활동을 높이 평가했으며, 그의 이름은 간호 분야의 공로자에게 수여되는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기장에 남아 있다.
3. 유산과 영향
앙리 뒤낭의 헌신적인 노력은 『솔페리노의 추억』[16] 출판을 통해 국제 적십자 운동의 창설을 이끌었다. 비록 뒤낭 자신은 개인적인 어려움으로 인해 초기 활동 이후 운동의 전면에서 물러나 한동안 잊힌 존재가 되었으나, 그가 시작한 적십자 운동은 전 세계적인 인도주의 기구로 크게 성장했다. 적십자의 활동 영역 또한 전쟁 부상자 구호뿐만 아니라, 전쟁 포로에 대한 인도적 지원 및 일반적인 재난 피해자 구호 등으로 점차 확대되었다.
오랫동안 잊혔던 뒤낭의 공적은 1895년 다시 조명받았고, 이는 1901년 제1회 노벨 평화상 공동 수상[15]으로 이어졌다. 그는 수상 상금 대부분을 유언에 따라 스위스와 노르웨이의 적십자사에 기증하며 인도주의 정신을 실천했다.
뒤낭은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의 활동을 높이 평가했으며, 그의 이름은 간호 분야에서 뛰어난 공헌을 한 인물에게 수여되는 나이팅게일 기념장에 남아 있다. 그의 생일인 5월 8일은 오늘날 '세계 적십자의 날'로 지정되어 전 세계적으로 기념되고 있으며, 그는 '적십자의 아버지'로 불리며 인도주의의 상징적인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3. 1. 적십자 운동
1859년, 앙리 뒤낭은 사업상의 문제로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를 만나러 가던 중 이탈리아 통일 전쟁의 격전지였던 솔페리노 전투 현장을 지나게 되었다. 이 전투는 프랑스-사르데냐 연합군과 오스트리아 제국 군대 사이에 벌어진 대규모 전투로, 양측 합쳐 20만 명이 넘는 병력이 충돌하여 약 4만 명에 달하는 엄청난 사상자가 발생했다. 뒤낭은 부상자들이 적군과 아군을 가리지 않고 전장에 그대로 방치되어 고통받는 참혹한 광경을 목격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즉시 현지 주민 여성들과 함께 자발적으로 구호 활동에 나서, 국적이나 군복의 색깔을 따지지 않고 모든 부상자를 치료하고 돌보는 데 헌신했다. 이때 그가 외친 "Tutti fratelli|투티 프라텔리it"라는 말은 그의 인도주의 정신을 상징하는 유명한 일화로 남아있다.[16]솔페리노에서의 경험은 뒤낭의 삶에 큰 전환점이 되었다. 제네바로 돌아온 그는 1862년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담은 책 『솔페리노의 추억』(Un souvenir de Solférino프랑스어)을 자비로 출판했다.[16] 이 책에서 뒤낭은 전쟁의 참상을 생생하게 묘사하며, 전투 중 부상당한 병사들을 중립적인 입장에서 적군과 아군 구별 없이 돌볼 국제적인 민간 구호 단체의 필요성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또한, 이러한 구호 활동을 보장하기 위한 국제적인 협약의 체결도 제안했다. 『솔페리노의 추억』은 유럽 각국의 지도층과 지식인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으며, 국제 적십자 운동이 시작되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했다.
뒤낭의 제안에 공감한 귀스타브 무아니에 등 제네바의 저명인사들과 함께 1863년 2월, '국제 부상 군인 구호 상설 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이 위원회는 훗날 국제 적십자 위원회(ICRC)의 모태가 되었으며, 뒤낭은 이 위원회의 위원으로 활동하며 국제 회의 개최를 위해 유럽 각국을 순방하는 등 적극적으로 노력했다. 그의 노력은 결실을 맺어 1863년 10월, 스위스 제네바에서 16개국 대표가 참가한 국제 회의가 성공적으로 개최되었다. 이 회의에서는 전시 부상자 구호를 위한 기본적인 원칙을 담은 10개 조항의 결의안, 즉 최초의 제네바 협약의 기초가 되는 '적십자 규약'이 채택되었고, 각국에 자발적인 구호 단체(훗날의 적십자사) 설립을 권고했다. 이는 국제적인 인도주의 활동의 새로운 장을 여는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오늘날 적십자의 상징으로 널리 사용되는 붉은 십자 표장은 뒤낭의 조국인 스위스의 국기(흰 십자에 붉은 바탕)의 색깔 배열을 반대로 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17] 이는 스위스에 대한 경의를 표하는 동시에, 적십자 활동의 중립성을 상징한다. 앙리 뒤낭의 생일인 5월 8일은 그의 업적을 기려 '세계 적십자의 날'로 지정되었으며, 그는 국제 적십자 운동을 창시한 공로로 "적십자의 아버지"로 불리고 있다.
이러한 인도주의적 공헌을 인정받아 앙리 뒤낭은 1901년, 프랑스의 평화 운동가 프레데리크 파시와 함께 제1회 노벨 평화상의 공동 수상자로 선정되는 영예를 안았다.[15] 비록 개인적인 삶은 순탄치 않았지만, 그가 시작한 적십자 운동은 오늘날까지 이어지며 전 세계적으로 전쟁, 재난, 질병 등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희망과 도움을 주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3. 2. 국제 인도법
1859년, 앙리 뒤낭은 이탈리아 통일 전쟁 중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를 만나 사업 지원을 청원하러 가던 길에 북이탈리아의 솔페리노에서 벌어진 솔페리노 전투를 목격하게 된다. 이 전투는 프랑스-사르데냐 연합군과 오스트리아 제국 군대 총 20만 명 이상이 충돌하여 4만 명에 가까운 사상자를 낸 참혹한 격전이었다. 뒤낭은 전투 후 전장에 방치된 수많은 부상병들의 끔찍한 모습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으며, 자발적으로 현지 여성들과 함께 구호 활동에 참여하여 1주일간 머물렀다. 그는 적군과 아군을 가리지 않고 부상자들을 치료했으며, 그 이유를 묻는 사람들에게 "인류는 모두 형제"라고 답한 일화는 유명하다.이 경험은 뒤낭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고, 그는 1862년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담은 책 『솔페리노의 추억』[16]을 출판했다. 이 책에서 뒤낭은 전쟁 시 부상당한 병사들을 적군과 아군 구별 없이 중립적으로 간호하고 구호할 국제적인 민간 조직의 창설과 이를 위한 국제적 협약의 필요성을 강력하게 제안했다. 이 책은 유럽 전역에 큰 반향을 일으켰고, 국제 인도법의 발전과 적십자 운동의 시발점이 되었다.
뒤낭의 제안에 공감한 인사들이 모여 1863년 제네바에서 "국제 부상 군인 구호 상설 위원회"(일명 5인 위원회)가 결성되었고, 뒤낭은 위원으로 활동하며 국제 회의 개최를 위해 노력했다. 같은 해 10월, 스위스 제네바에서 16개국 대표가 참석한 국제 회의가 열렸고, 이 회의에서 전시 부상자 구호를 위한 적십자 규약 10개조가 채택되었다. 이는 각국에 전시 구호 단체 설립을 촉진하고, 국제적인 적십자 조직의 탄생으로 이어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비록 뒤낭 자신은 이후 개인적인 파산 등으로 인해 적십자 운동의 전면에서 물러나게 되었지만, 그의 헌신적인 노력과 『솔페리노의 추억』에서 제시된 인도주의적 원칙은 제네바 협약을 비롯한 국제 인도법의 기초를 마련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후 적십자의 활동 범위는 전쟁 포로에 대한 인도적 구호, 자연재해나 분쟁 시 민간인 구호 등으로 점차 확대되었다. 이러한 인도주의적 공헌을 인정받아 뒤낭은 1901년 제1회 노벨 평화상을 프레데리크 파시와 공동으로 수상했다.[15]
3. 3. 기념과 추모
앙리 뒤낭은 '적십자 운동의 아버지'로 불리며, 그의 생일인 5월 8일은 세계 적십자와 적신월사의 날로 지정되어 기념되고 있다. 그는 솔페리노 전투의 참상을 목격한 경험을 바탕으로 『솔페리노의 추억』[16]을 저술하여 적십자 운동의 창설을 이끌었으며,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01년 제1회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15]뒤낭은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의 활동을 높이 평가했으며, 그의 이름은 간호 분야에서 뛰어난 공헌을 한 인물에게 수여되는 나이팅게일 기념장에 남아 있다.
스위스 하이덴에는 그의 업적을 기리는 앙리 뒤낭 박물관이 있다. 또한, 적십자의 상징 마크는 그의 모국인 스위스 국기의 색 배치를 반대로 한 것에서 유래했다고 알려져 있다.[17] 뒤낭은 1910년 세상을 떠났으며, 노벨 평화상 상금은 그의 유언에 따라 스위스와 노르웨이의 적십자사에 기증되었다.
4. 한국과의 관계
앙리 뒤낭이 창설한 국제 적십자 운동은 한국의 인도주의 활동에도 영향을 주었다. 6.25 전쟁 당시 국제 적십자 위원회(ICRC)를 비롯한 국제 적십자 기구들은 전쟁으로 고통받는 한국인들을 위해 의료 지원, 구호품 전달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다. 이는 전쟁 중에도 인도주의 원칙을 지키고자 했던 앙리 뒤낭의 정신이 반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현재 대한적십자사는 앙리 뒤낭의 이념을 계승하여 국내외 재난 구호 및 다양한 인도주의 사업을 통해 그 정신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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